정오를 지나 오후 한시로 넘어가는 시점에 글을 남긴다.
휴일의 오전 일지 같은 글. 휴일의 오전에 관해 남긴다. 휴일 오전에 무엇을 했는지. 그것이 어떻게 나의 쉼이 되었는지.
(활짝 열어둔 창문 밖에서 초등학생일 남자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남자아이들이 서로 서로 큰소리를 떵떵 치는 소리. 간간히 욕설과 괴성이 섞인, 아직 남성의 것이 아닌 그러나 여성의 것도 아닌, 그들이 곧 잃어버릴 목소리. 아래 아이스크림 할인점이 있어 나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자주 엿들을 수 있다. 건물이 아이들을 홀리는 그러나 악의없는 시골의 바보 여자같다. 아이들을 오게하고. 또 언제든 가게 두는. 나는 그 시골의 바보 여자의 얼굴 안쪽에서 의자를 당겨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정오가 지나자마자 내가 한 일은 이 텅빈 티스토리 블로그에 대한 바로가기 아이콘을 만든 것이다. 바로가기 아이콘을 만들 줄 몰라서 그것을 만드는 법을 검색했다. 이제 노트북을 펴면 다른 곳에 한눈파느라 쓰려고 했던 것을 잊지 않고, 쓰고싶게 만드는 그 기분을 날려버리지 않고 바로 이곳으로 들어와 쓰려한다. 이 블로그를 연 이유는 날 아는 사람들을 마주칠 가능성이 희박한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건 대학시절에 학교 앞에 살던 내가 거기서 한 시간쯤 떨어진 노들이라는 동네로 이사했을 때 느꼈던 해방감, 그리고 안정감과 매우 비슷하다. 대학시절 나는 매일 써클렌즈를 끼고 매일 화장을 하고 매일 예쁜 옷을 챙겨입고 친구들을 만나곤 했는데, 노들에는 내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맨 얼굴에 아무렇게나 입고 아무렇게나 김밥을 먹으며 온 동네를 돌아다니곤 했다. 배가 납작해지도록 힘을 주고, 빠른 걸음으로. 그곳에 사는 동안 나는 젊기도 젊었지만 배에 언제나 힘을 주고 걸었던 탓에 코어가 탄탄했고, 자세가 좋았고, 허리가 아팠던 적 없었다. 무엇보다 허리가 가는 편이었고 여간해선 뱃살이 생기지 않는 체질이었다. 나는 피티나 필라테스처럼 비싼 운동에 등록하지 않고도 납작한 배로 중심을 잘 잡고 다녔다. 나는 중심이 잘 잡혀있었다. 굳이 내 배에 관해 쓰고있는 이유는 내 배가 그런 상태를 잃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순간 중심을 잃었다. 중심의 힘도 많이 잃었고 점점 허리가 두꺼워지고 있으며 자세가 무너지고 있다. 내 정신상태도 마찬가지다. 장과 뇌가 서로 긴밀한 영향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아시는지. 장과 뇌의 형태가 서로 닮았다는 것을 의식해본 적 있으신지. 그 때의 나는 장과 뇌가 모두 아주 깨끗하고 가벼웠는데,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다. 무언가 뿌옇고 무겁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최악의 시기로부터 빠져나와 많은 부분에서 나아진 상태다. 다시 코어에 의식적으로 힘을 주기 시작했고, 그럴 의지가 생겼다. 무엇보다 내가 날 일으키고 싶은 의지가 생겼다. 아무튼 내가 나의 디지털 공간의 이사를 선택한 것은 글쓰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 싶고, 중심을 단단히 하고 걷게하고 싶기 때문이다. 쭉 펴지 않고 굽은 채로 고여버린 부분에 군살이 생긴다는 걸 느끼며 살고 계신지. 글도 글인데 이제 몸 이곳저곳을 정성스레 쭉쭉 늘여주는 시간도 가져야지. 어떤 소리도 영상도 없이.
휴일의 오전 일지를 적어보자. 이제서야. (언제나 무엇을 적으려고 화면을 띄우면 다른 얘기를 먼저 하게 된다. 다른 얘기를 하느라 먼저 쓰려고 했던 이야기를 잊기도 한다. 잊거나 쓰고싶은 마음이 잦아들기도 한다. 그런데 뭐, 잦아들면 잦아들도록 두자.)(그리고 이런 잡문을 쓰는 것에 개의치 말자. 개의치 말자. 쓸 수 있는 것들을 그냥 써보자.)
오늘은 무려 네시쯤 잠에서 깼다. 그래서 한참을 이불속에서 빈둥대다가 이불에서 나온 순간부터 하루가 시작되었다. 간단히 세수와 양치를 하고 보리차를 한 컵 마셨다. 보리차를 마시며 보리 찌꺼기만 남은 유리주전자를 씻어 오늘 마실 물을 끓였다. 보리차를 마시며 물이 끓길 기다리며 저 물을 보릿물로 할지 레몬물로 할지 고민한다. 그러다 오늘은 둘 다 끓였다. 레몬물을 작은 주전자에 옮겨 담고 엊그제 사서 물에 꽂아둔 딜의 하늘하늘한 잎사귀 한쪽을 떼어 넣고 대나무 티스푼으로 한두바퀴 휘휘 젓고 뚜껑을 덮었다. 지금 바로 그 레몬 딜 워터를 마시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이것을 마시기 전에는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기 전에는 애플민트 티를 마셨다. 오전 내내 마시고 또 마셨군.
딜을 차로 마시는 것은 처음이다. 물에 우러난 딜의 향기는 얼마전 석굴암으로 가는 산길의 산뜻한 냉기가 떠오르게 한다. 내 옆을 걸어가는 그에게 뱀딸기나 고사리라고 발음하던 때의 혀 끝의 느낌이 떠오른다. 뱀딸기. 고사리. 고사리 잎을 뒤집어보며, 어 이거 고사리 아닌가, 라고 말하던 때의 혀 끝의 느낌. 내 옆의 그는 뱀조심 표지판을 가리키고, 곧장 뱀구멍 하나를 찾아내 가리키고. 우리는 신나서 와 와 했지. 딜을 우려 마시는 것은 늦봄의 산속을 걸어가다 뱀딸기 꽃을 찾아낼 때의 기분을 준다. 애플민트는 지난주에 회사 화분에서 뜯어와 말려둔 것을 이제야 병에 담았다. 작은 병에 담았더니 모인 향이 좋았다. 오늘은 잎이 여섯개쯤 달린 마른 줄기 하나를 작은 주전자에 우려 마셔보았다. 기대했던 것 보다 향이 진해서 놀랐다. 아, 모르는 분을 위해 적자면, 동료와 회사 휴게실에서 몇 종류의 허브 화분을 가꾸고 있다.
그리고 오늘은 경주 커피플레이스에서 사온 원두를 처음 개시했다. 그래서 커피에 대해서도 꼭 적고 싶다. 금관총 근처의 커피플레이스에서 마셨던 커피를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맛이 정말 좋았기 때문. 나는 아이스라떼를, 내 옆의 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싱글빈으로 마셨는데, 두가지 다 맛본 우리는 감탄에 감탄을 연발했다. 테이크아웃해서 나와 한 모금 마시자마자 나는 다시 가게로 뛰어들어가 원두를 한봉지 샀다. 그것이 오늘 개봉한 원두다. 에티오피아 시다마 벤사 산타웨네. 따뜻한 드립으로 내려마셨는데 약간 무게감이 있는 산미가 아주 좋았다. 로스팅한 사람은 이 커피에서 목련향이 난다고 적고 있다. 내일 동료에게도 한 잔 내려줘야지.
매일 아침은 언제나 세수와 양치로 시작한다. 휴일 아침은 세수와 양치에 이어 설거지로 하루를 시작한다. 설거지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날이 휴일이다. 설거지를 끝내고, 도마 위에서 사과를 썰고, 마리메꼬의 넓적한 컵에 그릭요거트와 블루베리, 깍뚝썰기한 사과를 담고, 마누카 꿀도 떨어뜨리고. 한 입 입에 머금고서세탁을 시작한다. 검은 백팩과 어두운 남색의 바지를 함께 빤 다음, 모든 밝은 색상의 빨래들을 한꺼번에 또 빨았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김치라면을 끓여먹었다. 비 갠 후의 아침이라 그런지 이런 것이 무척이나 당겼다. 꽃병의 물을 갈아주고, 화분들에 물을 주고, 빨래를 널고서 책상앞에 앉았다. 꽃병에 꽂아둔 은행나무 가지에서 은행잎이 제법 나왔다. 정말 나무처럼. 정말 나무지만 정말 나무인것처럼 잎을 내놓고 있다. 줄기 안쪽에 잎이 돌돌 말려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이 나뭇가지는 얼마전 근처 아파트에서 강행한 무리해보이는 가지치기로부터 잘려나간 가지를 주워온 것이었다. 그 가지치기가 3월 내내 내 마음을 힘들게 했다. 이곳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힘들게 했겠지. 한 번은 참지 못하고 절단중인 인부에게 다가가 물었다. 왜 .. 이렇게까지 자르는 거에요? 아저씨는 말했다. 자를 때가 되어서 그래요. 또 자랄거예요. 나는 말했다. 너무 속상해서요. 조금만 자르시면 안될까요? 아저씨는 말했다. 괜찮을거예요. 자를 때가 되서 자르는거니까. ...
조금 더 어릴 때, 한 번은 어머니가 산책길에 꽃나무 여린 가지 하나를 꺾어서 나는 아주 많이 고통스러워했다. 왜 그걸 꺾냐고 핀잔을 주면서 ... 그런데 이번 가지치기로 느낀 것은 차라리 작은 한 인간으로부터 작은 가지 하나가 꺾이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그 작은 인간은 그 작은 가지를 위해 오래도록 소중히 물을 갈아주면서 바라볼테니까. 그리고 실제로 적당한 가지치기는 식물의 생장에 도움이 되니까. 이번에 허브를 가꾸면서 알게된 것은, 많은 허브들이 잎이나 마디를 잘라낸 곳에서 잎 세트를 두 개씩 내민다는 것이었다. 지금 그렇게 절단된 부분에서 바질 잎이 두 세트씩, 민트 잎이 두 세트씩 머리를 내밀고 있다.
이제 오후를 보내보자. 우리는 쓰고있는 동안 실제로 살지는 않는다. 살았던 것이나 살게 될 것, 살 수도 있었거나 살 수도 있을 것에 대해 쓸 뿐이다.